The Order of Things

Jungjin Lee’s “Thing” series photographs are shot first on film and then printed via traditional darkroom techniques onto the heavy, hand-laid Korean mulberry bark paper called hanji. The artist brushes photochemicals upon the paper, and the chemicals penetrate the surface. In the finished prints the rough fibers of the paper are often visible. Unlike conventional photographic paper, Lee’s hanji shows its texture and imperfections, creating a rich encounter between the viewer and the image-as-object. 

The prints are large, and so objects we may have dismissed as insignificant, or perhaps too familiar to be remarkable (old metal spring, leaf, sandals) now loom before us; thus enlarged, they must be important. This increase in depicted scale is a strategy common in European history painting, but also in scientific examination. Like the pursuit of the heart of the atom that reveals only empty energy, Lee’s visual inquiry seems to hold promise – yet the objects remain inscrutable. 

Each object is presented clinically, alone on a stark white field, as though on a clean slab for study. But if these are objects, where are the shadows? Fruits, seeds and vessels float unbounded in a void. 

A spoon freed of all context can exist nowhere and therefore becomes an idea of that spoon, akin to philosopher Alfred North Whitehead’s notion of an “eternal object.” Indeed; the artist shared with me that her work is “about eternal presence.” Her art heroically stands in defiance of time’s inevitable advance. The finished print is a trace of the spoon that once faced the camera, and hanji is a particularly durable fiber, such that the print may well endure for centuries. So while the spoon itself may be lost, Lee has succeeded in creating an “eternal object” that apprehends the spoon not as itself, but as an idea of itself, so that it might endure indefinitely.

Lee’s presentation of these humble items profoundly transforms our relationship to them, and to everything. The prints are all the same size, making the various depicted things seem equivalent. The camera apprehends and processes each item as if showing us the mechanism of our own perception – the finished photograph reduces the object’s physical characteristics to a printed simulation, the way our retinas flatten the world into a set of biochemical signals. She shows us that her treatment of these objects, while perhaps strange, is no less strange than that process by which we understand our world.

We recognize the items in each image. Yet what should feel familiar is rendered somehow unfamiliar – the feeling Freud called “uncanny.” Like a Hitchcock film in which the known is revealed to be otherwise, each of the “Thing” works produces a stirring in the gut. “I think I know this object, but... maybe not... hmmm....did I ever really know it?” Doubt takes root, prompting further questions, until: “What is knowing, anyway?” With the arising of that final question, the viewer arrives at a basic but crucial insight: the mind, with its strategies to order and make sense of the world around us, may well be engaged in a very dubious project. As the Yiddish saying goes, “man thinks and God laughs.” 

Whether on a walk in a busy city, amid a field of insects, or alone with swirling thoughts, the mind must edit out large amounts of data. This editing act is in one way a violent one, as some things are selected against, and abandoned. Lee seems to have collected abandoned objects for this series, as if to restore to them a measure of dignity. To view each work is to have an immediate, exclusive, direct encounter with a material object. Some works, such a bent nail, scattered rice, or antique spoon, have a stronger sense of reviving the forgotten. Her works seem haunted by the forgotten. They operate like images of lost children we see at the post office, children we might otherwise overlook in a sea of humanity. 

At the heart of our mind’s sorting mechanism is a decision: where to draw a line between what to retain, and what to discard? This decision is both very important, and yet quite arbitrary; different people pay attention to different things for different reasons at different times. So how does it feel to realize that our mind’s order of things rests upon a foundation of arbitrariness – that our castle of understanding is built on sand? Tension stretches between the object, and its version that our mind collects through our senses. Which is real? The power of Lee’s “Thing” series arises from reminding us that complete knowledge of a thing is impossible. Most people choose to trust their senses. The alternative would cut us off from the world outside our body, and that would be more than many could bear. Yet that is exactly the choice that faces us each instant. H. L. Mencken wryly said that “society is a set of lies agreed upon for the sake of convenience.” Can this not also pertain to our understanding of the material world in its entirety? The works of the “Thing” series raise this question, and the resulting frisson of profound doubt is another aspect of their allure.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wrote Shakespeare. The world, with all its things, escapes the mind’s grasp. Each “Thing” work focuses this realization on a single item, as if to say, “this object is a world unto itself. It wholly escapes you, and always will. Yet isn’t it lovely to behold?” 

All this brings me to what I regard as a key piece: an image of a nondescript blackboard framed in wood. This ambiguous flat black field, devoid of marks, might also be a window into some inky depth. All we can be sure of is that we see a piece of paper, with a marked surface – beyond that, it’s pure speculation regarding that which is depicted, or even if it is important. The Thing (subject/object) is presented as it is. Most tellingly, early prints of this work bore on the blackboard the Korean word “ 그냥” – literally, “as it is.” The artist says she found this word visually distracting and later removed it before making subsequent prints. But that marker, floating in the inky darkness, says it all: “the world is out there. You are in your head. Good luck.” She returns us to square one, to a clear-minded reckoning, re-accounting, re-centering. The confrontation that these works set up is one of honesty. It is about engaging that which we choose to forget, to overlook, even to marginalize. 

The thinker Martin Buber wrote: “We cannot avoid using power, cannot escape the compulsion to afflict the world, so let us, cautious in diction and mighty in contradiction, love powerfully.” After experiencing the “Thing” works, perhaps we can further say: knowing that our mind works via endless acts of exclusion, let us proceed with a spirit of elevated awareness and deepened compassion.

August, 2013
David A. Parker
(Artist, Art educator, Art advisor

사물의 질서

이정진의 사진 ‘사물(Thing)’ 연작은 우선 필름으로 촬영한 뒤, 수작업으로 제작한 한지 위에 전통적인 암실 기법으로 인화하여 얻어진 것이다. 작가는 종이 위에 사진 약품을 붓으로 문질러 표면으로 스며들게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친 종이의 섬유질이 쉽게 드러난다. 일반적인 인화지와 달리 이정진이 사용하는 한지는 이러한 질감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면서 오브제로서의 이미지(image-as-object)와 관객들 사이에 풍부한 조우를 만들어낸다. 

흔히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사물들, 혹은 반대로 너무나 익숙해서 눈에 띄지 않는 것들(낡은 철재 스프링, 나뭇잎, 샌달)은 대형 인화물의 형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토록 확대된 것을 보면 중요한 것들임이 분명하다. 스케일을 이렇게 확대하는 방식은 유럽의 역사화나 과학적인 실험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하나의 표현 전략이다. 과학자들이 텅 빈 에너지만을 드러내는 원자의 핵을 추적하듯이, 이정진의 시각적 탐구는 뭔가를 약속하는 듯 하지만, 결국 이 사물들은 파악할 수 없는 것들로 남겨져 있다.

여기에서 사물들은 마치 말끔한 연구실의 실험대, 강렬한 흰색 배경 위에 홀로 놓인 대상처럼 임상적인 상태로 제시된다. 이것들이 사물이라면, 과연 그림자는 어디에 있는가? 과실, 씨앗, 용기와 같은 사물들은 텅 빈 공간 속에 자유롭게 부유해 있다.

스푼이라는 대상은 모든 문맥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때 스푼은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말한 ‘영원한 오브제(eternal object)’라는 개념과 흡사한, 스푼이라는 ‘개념(idea)’이 된다.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영원한 현존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필자와 공유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역사적 시간에 불가피하게 내재하는 진보 개념에 도전한다. 최종 인화물은 카메라를 대면했던 스푼의 흔적이고, 한지는 특별히 내구성이 강한 섬유 재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품은 의미와 형식 모든 면에서 앞으로도 틀림없이 수 세기 동안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스푼 자체가 소실되는 순간 마침내 작가는 스푼을 사물이 아닌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영원한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사물은 다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소박한 물건들을 제시함으로써 이정진은 우리가 그 사물들과, 또 만물과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 무엇보다 그녀는 인화지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여 자신이 그려내는 모든 사물들을 등가로 만들어낸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들의 지각 메커니즘을 보여주려는 듯 아이템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전개시켜나간다. 결과적으로 최종 사진에서는 사물의 물리적 특징들이 인화된 시뮬레이션으로 축소되고, 이 세계를 평평하게 인지하도록 하는 인간의 망막 작용은 일군의 생화학적인 신호체계로 압축된다. 작가가 사물을 다루는 일은 이처럼 기이한 프로세스를 거치는데, 이에 못지 않게 우리가 망막을 통해 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 또한 낯설고 기이하다.

이정진의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사물을 분간해 낼 수는 있지만, 익숙하게 느껴져야 하는 것들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언캐니(uncanny)’(자신의 생령[生靈]이나 도플갱어를 보는 듯한 기이한 느낌 - 역자주) 같은 낯선 감정이 일어나곤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르게 그려내는 히치콕의 영화처럼 ‘사물’ 연작의 작품들은 관람자들의 뱃속을 휘저어 놓는다. “나는 이 사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 아마도 그렇지 않은가 보다 ... 흠 ... 정말로 이걸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렇듯 의심이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질문들이 솟아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질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관람자들은 기본적이면서도 중대한 통찰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질서를 만들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전략들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분명 대단히 모호한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격언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 

번화한 거리를 걸을 때나 사방에 벌레가 들끓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혹은 홀로 몰아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때, 정신은 수 많은 데이터를 처리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채택되고 일부는 버려지기 때문에 편집의 행위는 일면 폭력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정진은 이번 연작을 위해 버려진 사물들을 끌어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이것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던 존엄성의 기준을 회복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나하나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물질적인 오브제들과의 즉각적이고 독점적이며 직접적인 조우를 의미한다. 휘어진 못, 흐트러진 쌀알, 골동품 스푼과 같은 일부 작품들은 잊혀진 것들을 되살리는 보다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그녀의 작품은 잊혀진 것들에 사로잡힌 듯하다. 수 많은 군중 속에서 흔히 지나치고 마는 미아 찾기 포스터 마냥 그녀의 작품은 그렇게 작동한다.

인간의 마음 한 가운데서 작용하는 분리와 선별의 메커니즘이 바로 결정이다. 간직할 것과 버릴 것 사이 어느 지점에 선을 그을 것인가? 이러한 결정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상당히 자의적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물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머리 속에 간직한 사물의 질서가 자의성에 기반해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이해라는 커다란 성곽이 모래 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기분이 어떠할까? 그래서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우리의 감각을 통해 수집한 결과물로서의 사물 사이에는 점점 더 긴장이 팽배해진다. 과연 무엇이 실재인가? 이정진의 ‘사물’ 시리즈가 가지는 힘은 사물에 대한 완전한 앎이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각에 의존하는 편을 택하는 반면, 이러한 대안은 우리 자신을 몸 바깥의 외부세계로부터 끊어내게 되는데, 많은 이들이 견디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매 순간 우리가 직면하는 선택의 순간을 가리킨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였던 H. L 멘켄은 “사회란 편리함을 위해 협의된 거짓말의 집합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물질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사물’ 연작의 작품들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리고 심오한 의심에서 기인하는 전율은 이 대상들이 간직한 또 다른 매력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이 철학을 통해 꿈꾸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하늘과 땅 위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한없이 넘치는 사물로 가득한 이 세계는 정신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사물’ 연작의 각 작품들은 단일 아이템에 대한 이 같은 자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마치 “이 오브제는 그 자체에 관한 하나의 세계”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대상은 당신과 우리를 벗어나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바라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않은가?

이 모든 사항들은 궁극적으로 필자가 핵심작으로 꼽는 하나의 작품으로 향하게 한다. 목재 프레임으로 둘러싼, 별 다른 특색이 없는 블랙보드 이미지. 이 모호하고 평평한 검은 평면,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이 곳은 칠흑 같은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창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표면에 무언가 표시된 한 장의 종이를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보다, 그것은 묘사 대상에 대한, 또 그것의 중요도에 관한 순수한 추측과 탐색이다. 사물(주체/객체)은 있는 그대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강력하게 어필하는 부분은 초기 인화 단계에서 블랙보드 위에 한국어로 ‘그냥’이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는 점이다. ‘그냥’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 글자가 시각적으로 산만하게 보여서 이후 인화 과정에서 제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검은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흔적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세상은 저 바깥에 있고, 당신은 당신의 머리 속에 존재한다. 행운을 기원하며”라고. 그녀는 우리를 사각 프레임으로, 맑은 정신 상태에서 사고하기, 재고하기, 재중심화하기로 되돌려놓는다. 이 작품들이 제기하는 정면대결은 일종의 정직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잊고, 간과하고, 소외시키려 했던 문제들에 참여하고 관계하는 일이다.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우리는 권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세상을 괴롭히는 충동을 피할 수 없으므로, 언어의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순 앞에서 강해지고 강렬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 작업을 경험한 후에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우리의 정신이 끊임없는 배제 행위를 통해 작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고양된 자각과 깊이 있는 열정으로 나아가자. 

2013년 8월
데이비드 A. 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