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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Yeonha

세계를 사진으로 현전화하기


이정진은 현재 우리 사진계의 예외다. 사진이력 30여 년 동안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여성작가는 이정진뿐이다. 세련된 장인정신으로 사진만의 고유성과 특별한 결을 드러내며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가의 작품들을 대하면 문득 사진매체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진가의 존재적 위치에서 생성 변주되어, 사진이 도달하는 궁극의 자리가 새삼스럽기 때문이다. 극기와 희생, 단련의 이력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깜깜한 암실에서 견고하게 다져온 긴 작업 여정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신뢰하는 이정진 사진의 힘이고 어느덧 ‘이정진스타일’이 되었다. 스타일은 응고되기 마련일 터인데, 이정진은 시간이 더할수록 그 실험정신과 감각의 참신함이 한결같고 새롭다. 첫 발표작이었던 <Being>(1983)으로부터 최근작 <Everglades>(2014)까지, 예술적 자아와 실존의 현실은 수행자의 우주적인 호흡처럼 하나의 몸과 정신으로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잊혀진 것들, 배제되고 소외된 것, 잘 볼 수 없었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과 사라질 듯 살아남은 풍경에 숨을 불어넣으며 세계를 현전화하기. 세계의 음영을 되살려 세계를 사진으로 보듬어 안아 온 이정진의 작업은 처음부터 이미 예정된 궤도 속에서 순환하고 있었다.

이정진은 2009년에 다시 뉴욕으로 터전을 옮긴다. 89년부터 20여 년을 지속해 온 한지 작업의 프로세스에도 <Wind>(2004~2007)시리즈 이후, 변화의 국면에 접어든다. 작가만의 고유한 한지프린트는 지난 ‘동강사진축제 수상전’(2012)이 마지막으로, 지난해부터 아날로그와 디지털 프로세스를 겸한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거주지의 이동은 물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특별한 전회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시작 전부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스라엘 프로젝트’로 작가로서의 위상은 더욱 각별해진다. 프레드릭 브레너Frédéric Brenner의 기획으로 이뤄 진 ‘이스라
엘 프로젝트’에 스테판 쇼어, 토마스 스트루스, 요제프 쿠델카, 제프 월, 질 페레스, 로잘린 솔로몬 등 세계 사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 작가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12인의 작가 중 유일한 아시아 작가였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출판 된『Unnamed Road』(Mack출판사, 2014년)는 지난 해 ‘파리 포토’와 ‘아퍼추어’의 작가 싸인회에서 관객의 찬사를 받게 된다. 최근에는 뉴욕의 ‘Howard Greenberg Gallery’의 전속작가가 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연작, <Breath>(2009~), <Remains>(2012~)와 <Everglades>(2014) 를 진행하고 발표한다. 현재 ‘이스라엘 프로젝트’는 <This Place>라는 타이틀로 프라하의 ‘독스센터Dox, Center For Contemporary Art'에서 열리고 있고, 이와 동시에 파리의 ‘카메라 옵스쿠라 CAMERA OBSCURA’와 시카고의 ‘앤드류 배Andrew Bae'갤러리에서도 <Unnamed Road>가 오픈되었다. 그런가하면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습지를 공동작업 한 <Imaging Eden : Photographers Discover The Everglades>는 '노턴 뮤지엄Norton Museum of Art'에서 전시 중이다. 어떻게 이 많은 전시와 작업이 한꺼번에 수행될 수 있을까. 겉으로 드러난 광채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장인정신과 견고한 작업의 생명력은 (비록 사진을 읽
을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반 관객들의 공통감각을 일깨우나보다. 고조된 작가의 세계-감수성의 대답으로 내놓은 이 작품들에 대한 반응도가 높아질수록 이정진은 자신의 독특한 감각성의 세계로 침잠하며 새로운 감각공동체를 예인해내고 있다. 현대예술로서의 사진에서 만일 진리가 계시된다면, 작가의 작품에 화답하는 관객들과의 밀도가 높아지고 용적률이 넓어질수록, 즉 공명의 울림의 커질수록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대중성을 확보한다거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정진은 자신의 사진찍기가 내면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된 명상행위라는 것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 냉철한 모더니스트에게 사진은 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다음에야 피사체라고 하는 낯선 외부로 파고들 수 있는 자유의지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숨, 대지의 호흡


사진은 끝없이 생명을 만들고, 죽음을 지연시킨다. 아니 사진은 죽음과 생명의 원환고리를 하염없이 그려나가며 소멸을 차연시키는 영원한 현재이다. 존재와 무한, 그 소멸의 과정을 사진은 제 자신의 한계 속에서, 프레이밍하는 동시에 열어둔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가지로 주장하거나 강조되어질 수 없는 생각들, 흐름도 멈춤도 아닌 어떤 찰나, 무한히 열린 공간에서의 단절, 침묵하고 있지만 뜨거운, 현실의 초현실적인 단면들 등 은유의 표현 수단으로 이미지들은 선택되어왔다.’1)는 작가의 말처럼 사진은 어쩌면 없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초월적으로 머무르는 존재의 현전이 사진이기에, 의미란 비가시적이고 여기서부터 이정진이 마련한 신비의 세계가 개시된다. 세계의 음영을 되살려 온 이정진사진의 독특한 포즈를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석적 담론과 번역이 불가한 그녀의 사진은 프레임의 안과 밖으로 넘쳐나는 존재의 충일성외에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Remains>연작에서는 태풍 샌디가 휩쓸고 지나 간 흔적들 속에서 무서운 바람이 일어난다. 몇 억 년 전부터 살아왔을 생명체는 <에버글레이즈Everglades> 습지에서 유령처럼 꿈틀대고, <Unnamed Road>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좌표는 상실되어 있다. 이 땅은 그 옛날부터 거대한 타자의 힘이 지배하는 땅이기에, 정작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라지고 벌어진 삶과 죽음사이의 작은 틈만이 허용될 뿐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를 꿈꾸는 숨소리로 빛나는 <Breathe>. 이정진의 2009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 지대를 서성이며 죽음조차 생명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부드러운 위무로 가득하다. 조용한 숨, 거친 숨, 소멸에 이른 가녀린 숨, 끈질기게 이어지는 짙은 숨, 희미한 숨, 아련한 숨. 흐릿한 숨... 아득한 과거와 현재, 먼 나라의 이쪽과 저쪽, 한 순간의 경계, 프레임의 안과 밖이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반추상으로 옮겨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세계에 깃들인 생의 미궁을 포착해내는데 한지만큼 질기고 바람이 잘 통하면서 작가와 세계를 동시에 반추해내는 매질이 있을까. 이정진의 사진이 놀라운 점은 바로 자신이 다루는 매체를 주밀하게 살피면서도 섬세하고 따스한 심성으로 대상의 심연에 내재한 아포리아를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품의 외연과 내포적 의미도 결국 인간학적 국면으로 휘어지게 되어 있다.

 

조용히 빛나는 생명의 운동
 

리퀴드 라이트liquid light로 암실에서 인화지를 직접 만들어야 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찍힌 사진에 비해, 암실의 과정은 어둡고 지난했다. 언제까지, 몇 번을 반복해야 제대로 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지 암담했다. 까다롭고 습한 이 감광유제는 변덕까지 심하여 들인 공을 고스란히 돌려주지 않았다. 이정진은 이 작업을 20년 동안 반복했다. 하루에 겨우 2~3장의 사진을 만들 수밖에 없고, 동일한 에디션을 얻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오직 일회적인 작업이고 예측불허의 이미지다. 그런데 이정진의 한지 프린트는 기이하게 정갈하고 그 여백은 의미로 꽉 차 있다.
한지의 수많은 틈들은 그녀가 불러오지 못한 생의 잔여나 흔적으로 형상화되어 있고, 비가시적인 죽음의 공간들이 새겨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여백과 모든 결핍을 의미하는 틈들의 공존. 그 사이 사이로 숨이 드나들고, 짧은 생이 기입된다. 어떤 시간은 정지해 있고, 또 다른 시간은 흔들린다. 삶-사진-세계로 이뤄진 한지 프린트에서 생의 풀어낼 수 없는 아포리아도 보인다. 사진을 보고 비록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 변화하는 세계의 표면들을 통해 현상의 배후를 직관하게 하는 이 독특한 프린트는 아마도 이정진의 사진에서 아우라를 끝없이 확장시켜 준 주요한 원인일 것이다. 프린트의 저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특유의 우수는 그 프로세스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었지만 더 깊어진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방으로 이동. 세계를 인식하는 은밀한 주체에서 세계의 현상에 참여하는 이성이전의 원초적 경험의 활성화, 혹은 풍부한 상태에 이른 듯 더욱 강렬한 호흡을 보이고 있다. 사진가가 바라보는 이 순간의 분명한 의식 외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린호프612 카메라를 쓰면서도 노출계 없이 135mm렌즈로만 촬영한다. 목측으로 대략의 거리를 측정하며 촬영하는 매 순간 사진가의 몸이 대상과 함께 숨 쉬는 것이 한 번에 확보되는 것은 아닐 터. 지난 1년 동안 까다롭게 편집 된 그녀의 사진 책,『Unnamed Road』를 펼쳐보며 알았다. 이 책은 아코디언처럼 접혀있어 펼치면 노래가 울리고 접으면 대지의 숨소리가 들린다. 이 특유의 낭만성과 리듬이란. 애틋하고 아름답다.

‘에버글레이즈’ 습지에서의 일화는 이정진이 대상을 바라보는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곳은 사람의 땅이 아니라 악어와 새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동물들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의 눈으로 보거나 악어의 앵글로 몸을 변형시켜야만 했다고. 카메라 포맷도 새의 포맷, 악어의 포맷으로 제각각 달라졌고, 전시장 디스플레이는 오랜 늪과 함께 한 이들의 모습처럼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늪이라는 무한한 세계와 이 세계의 원초적 잠재력을 표상할 수 있다면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대상들의 불가해한 움직임에 감각적으로 동참해야 했을 것이다. 근접할 수 없는 야생의 은밀한 발생, 신비한 잉태의 현장에서 이정진의 카메라는 어떤 변화를 위한 생식력으로서 작품 전체를 형상화한다. 그녀의 사진은 정태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과정적이고 진화와 긴장을 함축한 밀도 높은 열린 지평을 선보이고 있다. 그래서 끝없는 진통이 예상되고, 더욱 흐리고 불투명해질 것이며, 신비로운 아우라와 함께 언제나 생성 중에 놓이지 않을까. 사
진보다 항상 먼저 있는 대상 속에서 지각 주체로서의 이 사진가는 사진-세계-삶 간의 의미들의 원천을 표상해 나갈 것이다. 결코 관념이 아닌 생생한 경험 세계 속에서.